“마음을 고쳐먹으니 새로운 길이 보이더라”

명주 장인 허호, 민숙희 선생의 명주 인생

대를 이어 실을 이어 명주를 만든 사람, 허호

공부를 잘했던 총명한 아이

이름 허호. 1959년 경상북도 상주에서 3남3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어릴 때는 집안 형편이 나쁘지 않았다. 총명한 아이였던 허호 선생은 초등학교 때 전교 회장을 했다. 그 시절에는 ‘전교 1등=전교회장’ 이던 시절이었다. 아버지는 누에를 치셨다. 어린 허호 선생은 아버지를 따라 뽕밭에 다녔다. 뽕밭에 따라 가면 새참으로 나오는 찹쌀떡 얻어먹는 재미가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친구 빚보증을 섰다 친구가 망하는 바람에 쫄딱 망하고 말았다. 허호 선생네 가족은 함창 교촌리로 이사를 했다. 허호 선생의 외갓집이 있던 교촌리는 명주를 짜는 마을로 유명한 곳이었다. 동네에 베틀 없는 집 없었고, 모든 집이 명주를 짜서 장에 명주를 내다 팔았다. 함창은 명주로 유명해 함창 오일장은 전국 유일의 명주전이 서는 곳이었다. 장날 함창 읍내는 명주를 사려는 사람과 파는 사람들로 항상 북적였다. 허호 선생의 어머니는 베틀에 앉아 쉼 없이 명주를 짰다. 별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허호 선생의 할머니의 할머니때부터 베를 짜왔으니까.

허호 선생은 어릴 적부터 어머니가 베를 짜는 것을 보며 자랐다. 일을 거들다가 호기심에 장난감처럼 베틀에 앉아 보기도 했다. 어느 날 마을에 전기가 들어왔다. 집집마다 베틀에 전기모터를 달기 시작했다. 모터가 달리자 생산성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한 대 겨우 돌리던 베틀이 두 대로 늘어났다. 그런데 없던 전기 모터가 달리니, 베틀이 견디질 못했다. 고장이 잦았다. 고장 날 때마다 기술자가 와서 고쳤는데, 어린 허호 선생은 어깨 너머 이 모습을 유심히 살펴봤다.

“베틀 고치는 걸 가만 보니, 별거 아닌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고장 나면 제가 직접 고쳐봤죠. 직접 고쳐서 돌리고 그러다 제가 직접 명주를 짜고, 어머니를 거들다가 직업이 됐죠. 해 볼만 하겠더라고요.”

베틀을 직접 고치고 개량까지 하며 자신감이 붙은 허호 선생은 베틀을 4대 까지 늘리고 본격적으로 베를 짰다. 베틀 잘 고친다고 소문이 나서 동네 베틀은 다 고치고 다닐 정도였다. 이웃집 베틀을 고치러 다니다 평생의 배필이 된 민숙희 선생도 만나게 됐다.

“연애를 오래 했죠. 한 동네 살면서도 남들 몰래 잘도 연애를 했는데. 어느 날 아내랑 경주에 놀러 간다고 버스에 탔다가 동네 사람한테 딱 걸렸지 뭡니까. 온 동네방네 소문 다 나고. 덕분에 결혼했죠. 허허허.”

교촌리 여느 집이 그러하듯 민숙희 선생도 어릴 때부터 어머니가 베틀에 앉아 명주 짜는 것을 보며 자랐다. 어머니가 대구로 유학간 오빠들 뒷바라지 한다고 떠나고, 베틀을 물려받은 고모가 시집가서 떠나자 자연스럽게 베틀에 앉았다. 5대 째 명주를 짜왔다는 허호 선생, 4대 째 명주를 짜왔다는 민숙희 선생은 결혼했고, 부부가 함께 명주를 짰다. 허호, 민숙희 부부의 최대 무기는 ‘성실성’과 ‘신뢰’였다. 종일 명주를 짜 명주전이 서는 날이면 자전거에 실고가 내다 팔았다. 좋은 명주는 비단장수 들의 눈에 띄는 법. 허호 선생의 명주를 한 번 받아간 사람들은 계속 허호 선생의 명주를 찾았다. 허호, 민숙희 부부는 주문 납기를 맞추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했고, 단골은 계속 늘어갔다.

“안동은 ‘안동포’라고 삼베로 유명한데, 베전 골목이라고 포목상 모여 있는 골목이 있어요. 그렇다고 삼베만 파는 건 아니고 명주도 파는데, 하루는 단골 포목상이 옆집 포목상에도 명주를 공급해달라고 하더라고요. ‘아니, 왜 경쟁 업체에 나를 소개하냐’고 물었더니, ‘그 집 명주가 좋은데 자기도 받을 수 있게 제발 좀 알려달라고 통사정을 해서 하는 수 없이 알려줬다’고 하더라고요. 허허허.”

주문은 들어오고 일감은 늘어났다.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신용’ 하나로 장사를 해 외상 거래도 많이 해왔는데, 십수 년간 쌓인 1000만 원이 넘는 외상을 떼먹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 치매 걸린 행세를 하는데, 어이가 없더라고요. 안 주려고 작정을 했구나. 이런 사람에게 외상값 받는 게 어디 쉽겠나. 그런 사람에게 외상값 받으려면 그 스트레스에 내가 죽을 것 같았습니다. 그냥 잊기로 했죠.”

첫 번째 위기: 회의

사실 그보다 더 큰 스트레스가 있었다. 1970년대 나일론 등 화학섬유가 보급되고, 의복 문화도 서양식으로 완전히 바뀌면서 사람들이 더 이상 일상복 옷감으로 명주를 찾지 않게 된 것이다.

“일감이 줄어들지는 않았어요. 그 시절까지만 해도 장묘문화가 매장이었기 때문에 수의용 명주 수요는 꾸준했어요. 살아서는 명주 옷 못 해 입어도 죽어서는 명주 옷 한 벌 해 보내는 게 자식들 심정이잖아요. 그런데 수의용 명주만 짜다 보니, 내 인생이 평생 수의용 명주 짜는 사람으로 남게 되는 게 답답했어요. 게다가 내 나름 어릴 때는 친구들 중에서 공부도 제일 잘하고 그랬는데, 스무 살 넘어가니 도회지로 나간 친구들이 생활도 화려하고 더 잘 나가는 것 같아 시샘도 들고 그랬죠.”

업에 대한 회의가 들 무렵, 허호 선생은 익숙하지만 새로울 수 있는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이른바 ‘쌍고치’였다.

“누에가 실을 토해 고치를 만들고 안에서 번데기가 되는데 쌍고치는 고치 하나에 누에가 두 마리 들어가 있는 겁니다. ‘옥사’라고도 하는데, 두 마리가 동시에 고치를 짜서 실 굵기가 불균등하기도 하고 마디가 생겨서 불량으로 칩니다. 그래서 수의용 명주 중에서도 제일 싸구려 명주죠. 가난한 집에서 어떻게 해서든 돌아가신 부모님 명주 수의를 해드리고 싶을 때 사는 게 옥사였죠.”

죽은 사람의 옷감만이 아니라, 산 사람의 옷감도 팔고 싶었던 허호 선생에게 어느 날 옥사의 무늬가 예사롭지 않게 보였다.

“쌍고치 명주실을 정성스럽게 짜봤습니다. 그런데 제 눈에는 자연스럽게 나오는 무늬가 멋있게 보이는 겁니다. 사실 수의용 옥사는 싸구려이기 때문에 촘촘하게 짜지도 않고 녹말 묻혀 대충 두껍게만 짜기 때문에 좋아질래야 좋아질 수 없었거든요. 그런데 ‘옷감’이라 생각하고 촘촘하고 정성들여 짰더니 훌륭한 옷감이 되는 겁니다.”

허호 선생의 안목은 정확했다. 허호 선생이 정성들여 짠 쌍고치 옷감은 염색이나 자수 없이도 자연스러운 무늬의 멋이 났다. 한복 시장의 호평이 이어졌고 주문이 밀려들었다. 집이 좁아 처갓집의 마당에 공장을 짓고 베틀 8대를 더 들여 12대까지 늘리고 24시간 베틀을 돌렸다.

이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허호 선생은 새로운 시도를 끊임없이 이어갔다.

“지금까지 익숙했던 방식에서 벗어나 조금만 달리 뒤집어 생각하면 새로운 길이 보이더라고요. 발상의 전환을 통해 계속 새로운 시도를 했어요. 모시실, 한지실도 접목을 해보고, 삶은 명주실과 마른 명주실을 섞어서도 써보고, 시도를 할 때마다 무늬와 질감 등이 조금씩 다 다르게 나왔어요. 조합이야 무궁무진하죠. 그렇게 새로운 시도를 할 때마다 시장의 반응을 보고, 반응이 좋은 건 계속 생산하고 그랬죠.”

전통 방식으로 명주를 짜왔지만, 전통 그대로만 고집하지 않고 새로운 시도를 멈추지 않은 결과, 지금 허호 선생은 100종이 넘는 명주 옷감을 생산하고 있다.

두 번째 위기: 유혹

1980년대 말 허호 선생은 진주의 실크 공장을 방문할 기회가 생겼다. 진주는 일찍부터 기계화, 자동화, 대량화를 추진했다. 당시 실크 생산 거점이었다. 지금도 한국실크연구원이 진주에 있다.

“공장 안에 기계 돌아가는 거 보고 눈이 휘둥그레 해졌죠. 깜짝 놀랐어요. 엄청나게 큰 기계가 어찌나 빨리 돌아가던지. 내가 짜는 것보다 폭도 서너 배는 넓고 순식간에 실크가 촥촥촥 짜져서 나오는데 정신이 하나도 없을 정도였죠. 내가 하는 전통 방식의 명주 짜기가 바보 짓으로 여겨졌죠.”

그 길로 허호 선생은 설비를 진주식 실크 공장식으로 다 바꾸기로 결심했다. 기계를 제작하는 공장까지 알아보고 계약하려던 때, 한 번 더 생각하게 됐다.

“막상 기계를 들여다 진주식으로 짜려고 하니, 덜컥 겁이 나더라고요. 저렇게 많이 생산하면 과연 팔 데나 있을까 싶었어요.”

당시만 해도 실크 수요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게다가 진주는 이미 기계화가 우리보다 30~40년은 앞서 있는데, 내가 지금 따라가 봐야 뒷 꽁무니만 쫓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30~40년의 격차를 따라 잡을 수도 없고, 경쟁력은 떨어지고, 재미도 없을 것 같았어요.”

오히려 새로운 기회를 발견했다. 당시 진주실크는 자동화, 기계화, 대량화를 추구하다 보니 ‘마른 실’을 썼다.

“전통 방식의 명주는 실을 물에 적셔 꾸리에 감아 씨실을 ‘북’ 안에 장착해 짭니다. 젖은 실로 짜니까 이게 씨실과 날실이 만나면서 서로를 고리 모양으로 감싸 나중에 말라도 수축이 없고, 바느질을 해도 재봉 구멍이 잘 벌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진주 실크는 자동 기계로 짜기 때문에 젖은 실로 짤 수가 없었어요. 마른 실로 짜는 진주 실크는 나중에 빨면 줄어들기도 하고, 씨실과 날실이 만나는 자리가 성겨서 재봉 구멍이 벌어지거나 합니다. 고급 명주는 아니었던 거죠.”

허호 선생은 차이점을 ‘발견’하는 데만 그치지 않았다. 전통 방식으로 계속 명주를 짜되, 전통 베틀 방식을 더 개량하기로 했다. 대구의 공업사에 찾아가 사람 손발로 돌리는 거의 모든 부분을 동력화 했다. 실제 현장에서 적용해보고 문제점이 있으면 계속 개선해 나갔다. 덕분에 허호 선생이 보유한 특허만 9개다.

허호 선생의 선택은 적중했다. 대중적인 실크 시장은 해를 거듭할수록 줄어들었지만, 허호 선생이 만드는 전통 방식의 고급 명주 수요는 꾸준히 유지됐다.

“요즘은 잔치 때 입는 한복도 안 짓고 빌려 입잖아요. 그런데 한복 대여점이 실크 한복을 빌려주면 관리가 어려워 수지타산이 안 맞습니다. 그러니까 수요가 계속 줄죠. 게다가 장묘 문화도 바뀌어 요즘은 대부분 화장하잖아요. 수의용 명주도 수요가 계속 줄죠. 대중 실크 시장은 거의 죽었지만, 고급 명주 시장은 그대로입니다. 서예나 다도, 고전 음악, 고전 무용 등 전통 문화와 관련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나 동호회 분들은 옷감을 보는 안목이 있고, 고급 명주로 옷을 짓습니다. 구매 충성도가 높죠.”

결국 유행에 휩쓸리지 않고 전통방식의 고급 명주 시장을 고수해온 것이 장수의 비결이 됐다. 대량 생산되는 저가 실크 시장이 중국산의 습격을 받을 때도 허호 선생의 고급 명주를 찾는 단골의 발길은 끊이지 않았다.

세 번째 위기: 피로

허호 선생은 사업적으로는 큰 위기도 겪지 않았고 돈도 제법 벌었다. 그런데 노력의 세월이 쌓이는 만큼 피로도 쌓여만 갔다. 2000년대 초반. 내적 위기가 찾아왔다.

“너무 힘들었어요.”

허호, 민숙희 부부는 결혼할 때 약속했다고 한다.

“돈 좀 벌면 치아 뿌리자.”

어려서부터 고된 명주를 짜는 일을 해왔던 부부는 어느 정도 돈을 모으면 명주 짜는 일을 그만 두고 ‘편하게’ 살고 싶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20여 년을 한 길로 달려오다 그만 지치고 만 것이었다.

“일을 열심히 할수록 거래처가 늘고, 거래처가 늘면 주문량이 늘고, 주문량이 늘면 일거리가 늘고. 노동 강도가 점점 심해지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결혼할 때 약속했던 것처럼 이제 돈도 제법 모았으니 그만 두고 다른 일을 찾아보자’고 하고 탐색에 나섰죠.”

허호, 민숙희 부부는 석 달 동안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다녔다. 그 중 상주 시내에서 옷가게를 하는 친구가 부러웠다.

“스포츠 의류 대리점을 하는 친구가 괜찮아 보였어요. 깨끗한 가게에 앉아 오는 손님들만 상대하면 되는 거니까. 그런데 친구한테 말했더니 ‘아서라’ 하데요. 이게 얼마나 스트레스 받는 일인지 모른다고. 1년 내내 가게 문을 닫을 수도 없고, 종일 가게 안에 앉아 있으면 답답하고, 한 개라도 더 팔기 위해 온갖 서비스를 다 해야 하는데 진상 손님이라도 만나면 얼마나 힘든 줄 아냐고. 그 친구는 ‘세상에서 네가 제일 부럽다’고 하데요. 그 길로 생각을 고쳐먹었어요.”

막상 새로운 일을 하려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명주를 짜는 데는 전국 최고라는 자부심이 있었지만, 나이 들어 새로운 일을 하려면 밑바닥부터 다시 해야 했다. 그래서 허호 선생은 마음을 달리 먹었다.

“지금부터 더 이상 돈 때문에 일을 하지는 말자.”

그 때부터 또 다시 새로운 것이 눈에 들어왔다.

“공장 구석구석에 옛날 도구가 쳐박혀 있었어요. 전통 베틀을 계속 동력화 하고 개량하다 보니까, 동력이 안 들어가는 옛 도구는 다 쓰레기 취급했던 거죠. 그런데 남들은 나무로 된 건 다 불 때고, 쇠로 된 건 고물장수한테 다 넘겼는데, 난 그걸 안 버리고 구석에 쳐박아 뒀어요. 아마 돈 버느라 너무 바빠서 치울 생각도 겨를도 없었던 것 같아요.”

옛 도구를 꺼내 먼지를 털고, 뻑뻑한 곳에는 기름을 치고 다시 돌려봤다. 아니 이게 왠 일인가. 재밌었다.

“분명히 쓰레기였는데. 이게 다시 돌려보니 재밌더라고요. 그 때부터 취미가 됐죠. 그 때부터 비슷한 건 다 수집하고 다녔어요.”

집에 있던 옛 도구를 정비하고, 남의 집에 있던 것까지 수집해 가져다 놓으니 공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공장을 아예 함창 읍내로 옮겼다. 그 때부터 또 다른 기회가 찾아왔다.

“읍내로 공장 옮긴 뒤에 한 번은 함창 읍장이 도와달라 하데요. ‘은어 축제’를 하는데, 허 사장이 전통베틀도 돌리고 하니까, 축제 장 나와서 시범을 보여 달래요. 그래서 명주 친목회 하는 사람들한테 얘기해서 명주 옷 입고 나와 명주 패션쇼도 하고, 전통 명주 도구들 시연회도 했죠. 그래서 축제 이름도 ‘명주의 고장 함창 은어 축제’가 됐어요. 그 때부터 사람들이 전통 명주에 대해 다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죠.”

그 뒤 새로운 인생이 펼쳐졌다. 전통 고급 명주는 아는 사람들만 하는 명품이었는데, 허호 선생을 통해 전통 방식의 명주 짜기가 널리 소개되면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전통 명주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허호 선생은 지역 명사가 됐고 미국, 일본 등 해외에서도 주목하는 명주 장인이 됐다. 그는 옛 것에서 재미를 찾았을 뿐,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다.

그리고 그에게 또 다른 즐거운 변화가 찾아왔다. 아들의 변화다.

허호 선생은 내심 아들이 가업을 이어 명주 장인이 되기를 바랐다.

“어릴 때부터 넌지시 떠 봤죠. 그러다 고등학교 때 진지하게 물어봤는데 질색 팔색을 하더라고요. 그럴 만 했죠. 부모가 일하느라 힘들어 하는 걸 다 보면서 컸으니까. 특히 고등학교 때는 내가 명주 일 그만 두고 다른 일 찾아보러 다닐 때니까.”

그러다 허호 선생이 일을 즐기기 시작하면서 아들도 부모님의 일을 달리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정적 계기가 찾아왔다.

“일본은 산업유산이라고 해서 양잠 산업, 방직 산업 유적 등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보전하는 일을 많이 하고 있나봐요. 아들이 지금은 문경시 공무원인데, 일본 선진지 견학을 갔는데, 거기서 강사가 ‘한국에는 상주 함창의 허호 선생님이 이런 활동을 하고 계신다’고 소개를 했데요. 그 때 같이 간 공무원이 ‘여기 허호 선생님 아들이 있다’고 했죠. 그 때 느낀 게 많았나 봐요. 지금은 공무원 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가업을 물려 받기 위해 관련 자료도 스스로 조사하고 적극적입니다. 허허허.”

허호 선생의 아들이 명주 가업을 물려받으면, 6대 째다.

하지만 사실 6대가 아니라, 7대, 8대, 어쩌면 가업은 15대를 넘을지도 모른다. 명주는 인류의 문명과 함께 태동한 옷감이었고, 이미 삼국시대부터 국책사업 취급을 받아온 산업이었다. 화폐가 발달하기 전가지 명주와 베 등 옷감은 세금으로 내는 돈과 같은 것이었다. 수천 년 동안 우리네 어머니들은 항상 베를 짜왔다. 허호 선생이 본인을 ‘5대 째’라 하는 것은 할머니로부터 “할머니의 할머니부터 명주를 짜왔다”는 얘기를 직접 들은 것일 뿐, 훨씬 이전부터 명주를 짜왔을 것이다.

허호, 민숙희 부부의 명주 인생이 빛나는 것은, 그들이 전통에만 갇히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도전을 하면서도 명주와 업의 본질을 잊지 않았다는 것이다. 산업화와 함께 아주 많은 것들의 ‘대’가 끊겼지만, 고집스럽게 대를 이어 온 그들 덕에 명주 5000년 역사는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