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buter 사진 Choi Hyungrak

[오.마주.봄] “평면으로부터 입체까지” 정현지 작가

Q. 이번 전시 작품을 어떻게 기획했나요?

전시의 시작점이 된 이름이 ‘로부터(ROBUTER)’라서 “평면으로부터 입체까지”를 주제로 삼았 어요. 명주라는 재료를 대하는 태도와 만드는 방식을 고민했고, 명주라는 평면 재료를 입체적으 로 해석하는데 주안점을 두었어요. 그 첫 번째 방법으로는 평면재료에 입체적이거나 공간적인 이미지를 포개어 보았고, 다음으로 여러 겹의 두께를 줘서 그에 따른 재료의 밀도 변화를 살펴 보았어요. 명주가 지닌 반투명함 덕에 겹침 사이에 공간이 생기고, 깊이에 따른 다양한 톤을 만 들어주는 것 같아서 그런 면을 잘 활용하려 했습니다.

Q. 명주가 다른 페브릭에 비해 다루기 까다롭지 않나요?

재료를 보고 만지고 느끼는 과정이 즐거워 잘 하고 싶다는 마음이 계속 생겨났어요. 특히 ‘투박이’의 거칠면서도 불규칙한 독특한 질감이 매력적이에요. 올의 굵기가 다양하게 나와서 명 주 자체의 은은한 광택이 햇빛을 만날 때 또 다른 매력을 보여주거든요. 작업하기 까다로운 재료이지만 꾸준히 연구하고 연습해 기술적인 면을 발전시키고 싶은 욕심이 나게 하는 재료이 기도 합니다.

Q. 이번에 새로운 시도를 하신 건가요?

프로젝트 시작하기 전에 허호 선생님 인터뷰를 여러 번 보았었는데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옛 것을 그대로 두면 박물관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오랜 시간 한 가지를 해온 장인인 허호 선생님마저도 옛 것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고 시대의 변화를 인지해 항상 새로운 것을 시 도하시려는 모습에서 큰 감동을 받았고 자극이 됐어요. 여러 겹을 겹치는 작업은 제가 기존에 해오던 방식은 아니었어요. 하지만 ‘뭔가 자그마한 것 하나라도 새로운 것을 시도해봐야지. 나 도 조금이라도 다른 방법을 모색해야지‘ 싶은 마음이 든 것이죠. 허호 선생님이 제게 새로운 방향성을 제기해주신 셈이에요.

Q. 평면에 입체를 적용한다는 발상이 새로운 데요.

병풍 속 풍경화나 민속화 중에는 입체적인 사물을 평면적으로 표현한 것들이 많아요. 이런 표 현 방법이 재밌게 느껴져 이번 작업에 적용시켜보고 싶었어요. 집이나 골목길 같은 요소는 제 가 늘 좋아하고 재밌어 하는 주제이기도 하고요. 사람한테 집은 중요한 공간이잖아요. 제가 가죽으로 한 작업 중에 ‘이동하는 집’이라는 작품이 있어요. 돌아갈 한국의 집에 대한 그리움 같은 마음이 저도 모르게 담긴 것 같아요.

Q.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네덜란드에 온 이후로 보자기 작업이 외로움을 달래주는 작업이기도 했어요. 가 족과 친구들이 그립고 혼자 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 보자기 작업을 하면서 마음의 안식을 삼았 던 것 같아요. 하다 보니 이제 보자기가 저만의 디자인 언어를 전달하는 매개가 되어 가고 있 어요.

Q. 예전 작품 중 검은 직육면체 도형을 도안으로 한 조각보 작업(‘검은 벽돌’ 시리즈)이 인상 적입니다.

보자기의 전통적인 이미지도 좋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고 보자기를 통해 저만의 이야기와 디 자인 언어를 전달하고 싶었어요. 평면과 입체의 관계를 표현하는 것이 제 작업의 주제였기에 일단 가장 기본적인 도형부터 표현해본 것이죠.

Q. 스위스 로잔 예술대학(ECAL)에서 ‘럭셔리 앤 크래프트맨십’ 과정을 마쳤는데, 어떤 작업을 주로 하셨나요?

커리큘럼 자체가 독특해요. 대부분의 교육 과정이 브랜드와 콜라보레이션으로 이뤄져 있어요. 모비엘(Mauviel), 에르메스(Hermes), 바쉐론콘스탄틴(Vacheron constantin) 같은 럭셔리 브 랜드들과 크래프트맨십이라는 주제로 브랜드 장인과 학생들이 협업해 작품을 만들어요. 간혹 선택된 작품은 출시되기도 합니다.

Q. 작가님 작품은 에르메스에서 출시되었죠?

에르메스 중에 쁘띠 아쉬(Petit H)라는 브랜드가 있어요. 에르메스에서 사용하고 남은 재료, 잘못 인쇄됐거나 아쉬운 점이 있는 제품들을 활용해 새로운 제품으로 재탄생 시키는 브랜드입 니다. 프로젝트 자체가 어린 아이의 상상력을 요하는 프로젝트인데요, 저는 ‘Petit dancer on the table (탁자 위의 작은 댄서)’ 컨셉으로 가죽 테슬이 달린 연필꽂이가 되는 팽이를 만들었 어요. 연필을 꽂아 팽이를 돌리면 가죽 테슬이 치마처럼 확 퍼지는 제품이었는데, 한국의 에 르메스에서도 전시됐었죠.

Q. 작업의 영감은 주로 어디서 얻으시나요?

평범한 일상에서 주로 얻어요. 길을 걷다 마주치는 것들을 관찰하죠. 건물의 구조, 건물의 기 둥과 면이 어떻게 만나는지, 벽돌의 짜임, 타일의 패턴, 창문의 구조 같은 것들이요. 이런 구 조적인 피사체들이 평면과 만나는 패턴을 유심히 보고 사진으로 남겨둡니다. 프로젝트를 할 때 스케치를 많이 하는데, 스케치한 것들을 요소별로 다양하게 조합하면서 반복적으로 스케치 하면서 발전시켜요.

Q. 지금 살고 있는 네덜란드 아인트호번은 어떤 곳인가요?

아주 작은 도시예요. 자전거를 타고 도시의 끝에서 끝까지 30~40분이면 갈 수 있죠. 작은 도 시이지만 디자인 학교들은 물론 한국의 카이스트 같은 과학기술전문 대학들이 모여 있어요. 첨단 지식과 크리에이티브의 중심이라고 하더군요. 개인적으로는 소규모 스튜디오들도 많고 크리에이터 동료들이 많은 점이 좋아요.

Q. 궁극적으로 표현하고 싶은 것, 목표 같은 것이 있나요?

아직 최종 목표 같은 것이 구체적이거나 뚜렷하지는 않아요. 제가 지금 갖고 있는 느낌과 생 각을 꾸준히 표현해 가다 보면 주제나 소재도 조금씩 변화할 테고, 이렇게 시간이 쌓이면 ‘내 가 궁극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것들이 이런 것이었구나’하는 순간이 오지 않을까요. 지금은 현재의 관심을 충실히 표현하고 싶어요. 할머니가 될 때까지 오래오래 지금과 같은 하루를 반 복하는 것이 제가 하고 싶은 일인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