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5000년 명품, 명주

중국 삼황오제 신화에 첫 등장

우리의 단군신화처럼 중국에는 ‘삼황오제’ 신화가 있습니다. 이 중 헌원씨라는 임금의 왕비 서릉씨가 어느 날 뽕나무 아래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습니다. 그때 뜨거운 찻잔 안에 누에고치가 하나 떨어졌습니다. 서릉씨가 고치를 건지다 실이 뽑혀 올라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실로 천을 짠 서릉씨는 사람들에게 누에를 치고 고치에서 실을 뽑아 천을 짜는 것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동아시아에서는 5000년 전 인류 문명의 시작부터 누에를 이용해 비단을 짰고, 그 인기는 유럽까지 전파돼 유라시아 대륙을 가르는 ‘실크로드’(SILK ROAD)가 탄생한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아주 오래전부터 누에를 기르고 비단을 짰습니다. 중국에서는 고구려를 ‘뽕나무가 많다’ 하여 상역(桑域)이라고 불렀습니다. 그것도 아주 잘 짰습니다. 비단은 짜는 방식에 따라 시(絁)·겸(縑)·주(紬)·초(綃)·능(綾)·사(紗)·금(錦) 등 다양한 종류가 있는데,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것은 ‘주’, 즉 명주였습니다.

새벽 여명처럼 아름답고 상아처럼 고운

신라에서는 ‘조하주’(朝霞紬), ‘어아주’(魚牙紬)가 유명했습니다. 새벽 여명(조하, 朝霞)처럼 은은한 빛이 감돌고, 바다사자의 이빨(어아, 魚牙), 즉 상아처럼 고운 광택이 나는 고급 섬유여서 당나라에서도 인기가 높은 명품이었습니다. 서아시아의 페르시아인들은 물론 유럽의 로마인들까지 실크로드를 따라 신라에 찾아왔습니다. 필시 신라
명주를 구하기 위해서였을 겁니다. 중국에서 먼저 발명돼 전래된 것도 우리 선조들은 명품으로 발전시켜 역수출하는 사례가 많았습니다. 종이와 도자기 모두 중국이 종주국이었지만, 고려에서 만들어진 한지와 상감청자는 송나라 부자들이 줄을 서고 수년을 기다려야 구할 수 있는 진귀한 명품이었습니다.

명나라 황제도 반한 조선의 명주

신라, 고려 명주의 인기는 조선까지 이어졌습니다.중국의 비단이 색깔과 무늬가 화려한 데 비해 조선의 명주는 얇고 부드러우며 은은한 색을 띠는 미니멀한 특유의 멋이 있었습니다. 명주의 촘촘함은 ‘새’라는 단위로 매깁니다. 1새에 20올인데, 명나라 황제는 보름새(15새. 300올) 이상의 자색 명주를 조선에 주문하곤 했습니다. 잠자리 날개보다 얇고 하늘하늘 하면서도 촘촘한 최고급 명주였습니다. 조선에서 명주 생산은 국책사업이었습니다. 임금이 ‘선농단’에서 농사가 잘 되기를 기도하듯이 왕비는 ‘선잠단’에서 양잠이 잘 되기를 기원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지명에는 양잠과 관련된 지명이 많습니다. 서울 송파구 잠실동은 원래 국립양잠소인 ‘잠실도회’가 설치돼 있던 곳입니다. 한양에서 동쪽에
있다 하여 ‘동잠실’로도 불렸고,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쪽에는 ‘서잠실’이 있었습니다. 그 후에 남쪽에 잠실을 하나 더 지었는데, 송파구의 잠실과 구분하기 위해 지금은 ‘잠원’이라 바꿔 부르고 있습니다.

사라져가는 명주 역사를 잇다

일제강점기와 전쟁을 거쳐 명주가 다시 ‘국책사업’의 지위에 올라선 것은 1950년대 말이었습니다. 고급 천연섬유로서의 명주의 세계적 인기는 여전했고, 수출 효자 상품이 됐던 것입니다. 정부에서는 명주산업 육성을 위해 1962년부터 ‘잠업증산 5개년 계획’을 실시했습니다. 지역마다 누에고치에서 명주실을 뽑는 제사공장이 세워졌고, 웬만한 농가에서는 적게나마 누에를 쳐 고치를 내다 팔아 수익을 올렸습니다. 1974년에는 양잠 농가가 50만에 이르는 등, 농촌에서는 누에치는 풍경이 흔했습니다.
그러나 1970년대부터 나일론, 폴리에스터 등 화학섬유가 대량생산되고, 의복 문화가 바뀌면서 명주는 설 자리를 조금씩 잃어갔습니다. 옷장에 명주 한복 한 벌 없는 집이 더 많은 시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000년 명주의 역사를 꿋꿋하게 이어가는 마을이 있습니다.
경상북도 상주의 함창입니다.